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캐터펄트 작전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>[[조지 6세]] : "그대는... 오늘 어째서 그렇게... 기분이 좋은 것이오?" >[[앤서니 이든]] : "그 말씀대로입니다, 폐하. 우리한테는 더이상 떨어져나갈 친구들이 없습니다. '''이제 우리는 홀로 남았습니다.'''" 영국 국민들은 '간만에 정부가 한 건을 해냈다'면서 열광했지만, 정부의 반응은 이렇듯 암울했다. 그리고 이든의 예측대로, 프랑스의 반응은 '''[[토사구팽|아쉬울 때 손 벌릴 때는 언제고 이젠 우리 등 뒤에 칼을 꽂냐]]'''였다. [[됭케르크 철수작전]]과 함께 영국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던 [[비시 프랑스|비시 정부]]는 단박에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했으며, 비시 프랑스 군대에는 반(反) 영국 정서가 퍼져나갔다. 그 결과, 1940년 다카르 앞바다에서는 리슐리외를 위시한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 및 드 골의 공격을 방어했으며, 1942년 [[횃불 작전]] 때는 카사블랑카에 정박해있던 장 바르가 미완성 상태로 주포도 1개 주포탑만 완성돼서 절반인 4문만 보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저항하여 미국 전함 USS [[매사추세츠]]와의 포격전 끝에 대파당했고, 연합군은 한동안 비시 프랑스 군대의 '''완강한 저항'''에 부딪쳐야 했다.[* 사실 완강하다고 해봐야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은 [[횃불 작전]]이 개시된지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 항복해버렸다. 항전파와 투항파가 갈려 있기도 했거니와, 영국에는 이를 갈아도 미국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. 이후 재빠르게 전향하여 독일군과 싸운 것은 덤. 끝까지 항전을 이어나간 [[자유 프랑스]]군 정도를 제외하면 낮은 사기는 2차 대전 프랑스군의 고질적인 문제였다.] 물론 리슐리외는 미국에서 재개장을 받고 [[자유 프랑스]] 해군 소속으로 영국 함대와 함께 작전하는 등의 기록이 있지만, 보통 이런 경우는 비시 프랑스로부터 전투를 통해 배를 빼앗거나 항복시킨 후의 이야기라는 것이 문제다.이 때문에 횃불 작전 당시 미국 외교관 로버트 H.머피는 [[드와이트 아이젠하워]] 원수에게 이 사건을 들면서 프랑스는 순순히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, 과연 그 말대로여서 [[프랑수아 다를랑]] 제독에게 "미국인도 영국놈들하고 같은 족속이구만!"하고 까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